서태지 자서전 8. 신시사이저, 계속된 음악생활

Posted by RAY.D
2015. 2. 6. 21:08 뮤지션 이야기/국내





잠깐 얘기가 딴 곳으로 흐른 것 같다. 난 부모님들의 끈질긴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북공업 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던지 뜻을 꺽어주셨다. 사실 난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어렸을 때부터 고집하나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또 당돌한 면도 있었다. 혹 내 곱상한 얼굴만 보고 시비를 걸었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난 남자에게 좀처럼 먼저 시비를 걸지는 않지만 일단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냥 두지 않았다. 비록 체격은 작았지만 내겐 당찬 면도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1학년 때엔 잠시 음악을 멀리하고 컴퓨터와 제도 쪽으로 빠져들었다. 음악보다는 평소 나의 꿈인 훌륭한 설계사가 되기 위해선 1학년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것 같았다. 그러나 2학기 들어서면서 잠시 멀리했던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일본 뮤직비디오를 봤는데 일본의 뉴뮤직그룹들이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번엔 일본에 있는 또래 아이들과 혼성 그룹을 만들어 보기로 마음먹고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본에서 2명 한국에서 2명이 모여 헤비메탈 그룹을 만들어 놓으면 정말 그림이 괜찮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땐 아버지의 도움으로 신시사이저를 구입해 오랜 소원을 풀었다. 나는 지금도 신시사이저를 맨 처음 구입했던 당시의 기쁨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이미 컴퓨터 음악을 알고 있을 때 였고 신시사이저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시사이저를 들여오던 날 저녁 난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머니가 너무 시끄럽다고 싫어해 여름인데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팥죽 같은 땀을 흘려가며 밤새 악기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신시사이저도 모두 독학으로 배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날 혼자 힘드로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아버지는 '이게 정말 네가 만든 것이냐'며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다. 작사 작곡 반주에 노래까지 한 내 재주가 상당히 가상했던 모양이다. 난 결국 일본에 건너가 그룹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대신 신시사이저를 구입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음악을 하는데는 뜻밖에도 기계 조작 능력이 뛰어난 내 손재주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난 오디오를 개조해서 더블데크를 만들었으며 드럼 머신도 부품을 사모아 조립한 후 리듬을 만들어 넣었다. 말하자면 조금 불편하지만 그런 대로 녹음을 끝낼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것이다. 이때부터 친구들과 연습도 집에서 주로 했다. 사실 그 동안은 연습할 데가 없어 당시만 해도 유행하던 합주실을 찾아다니며 어렵게 연습하곤 했었다.  간이 녹음실에 해당하는 합주실은 한시간에 5천원을 받았는데 다섯 명이 천원씩내서 연습하곤 했다. 나는 당시 합주실이 장사가 잘 되는 것 같아 아버지 친구에게 한번 해 보라고 권유해 아버지 친구분이 어린 내 말을 믿고 합주실을 개업해 지금까지 짭짤한 재미를 보고 계신다. 합주실은 지금도 메탈하는 친구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요즘은 한시간 사용료가 3만원으로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합주실에는 머리를 여자처럼 치렁치렁 딴 그룹 가수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내노라하는 세션맨들도 가끔 얼굴을 나타냈다. 기타리스트 이중산씨도 종종 합주실에 나와 후배들에게 기타 치는 법을 가르쳐주시곤 했다. 이중산씨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신중현씨와 더불어 국내에선 전설적인 기타리스트였다. 수없이 많은 문하생들이 기타를 배우려 모여들었지만 쉽게 가르쳐 주는 법도 없었다. 나도 한때는 이중산씨에게 기타를 배워보고 싶기도 했지만 혼자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계속 독학으로 기타를 익혀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