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자서전 11. 시나위의 멤버
내가 '시나위' 멤버가 됐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당시엔 H2O, 백두산, 시나위가 가장 인기가 높았는데 그곳의 한 멤버가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나위 멤버가 됐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었다. 머리를 기르고 다녀야 되는 일이 그렇게 곤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친척집에도 갈 수가 없었고 학교도 다니기가 힘들었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는 거의 학교도 가지 않았다. 학교측과는 아버님과 레코드사 측이 이야기를 해 양해를 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등학생들은 일단 가수로 데뷔하면 학교를 다닌다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TV, 라디오 출연과 인터뷰를 하러 다니다보면 학교는 그만두고라도 머리 깍을 시간도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학교측은 어쩔 수 없이 양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머리를 길러 뒤로 동여매고 다니는 생활이 너무 어색해 처음엔 팀 형들에게 머리를 자르겠다고 통보를 하기도 했으나 프로가수니까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꼭 길러야된다고 강권해 다시 마음을 바꾼 적도 있다. 대학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것도 정확히 말하면 내가 시나위에 들어갈 때부터 였다고 볼 수 있다. 음악에 일단 빠져들고 보니 나 자신도 대학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 내가 시나위 멤버로 들어갈쯤엔 아버지도 확실한 후원자가 돼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소속 레코드사인 오아시스 레코드사와 나의 전속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신동에 가깝다'라는 레코드사 측의 칭찬을 듣고 상당히 고무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기왕 시작하였으니 열심히 해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이때쯤 앞으로 설계사보다는 가수로 이름을 떨쳐보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설령 내가 이름을 날리는 가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음악을 하며 일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난 지금도 자신의 뜻을 꺽고 내 뜻에 따라주신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 평소엔 따뜻하게 말 한번 걸어주신 적이 없는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사랑에는 늘 남다른데가 있었다. 누나와 내가 밤에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날벼락을 내려 놓고는 어머니를 통해 우리 방의 동정을 살피곤 하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일단 꾸지람을 하셨지만 우리들이 상처를 받지 않을까 늘 걱정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 사업은 특별히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았다. 원래 성격이 빈틈이 없는 분이시라 요령을 피우지 않았다.
시나위 멤버가 돼 무대에 설 기회가 늘어나자 나에게도 이른바 팬이라는 것이 생겨나고 팬레터도 도착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팬레터는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후에 많은 팬레터를 받아보면서 이런 기분은 점차 없어졌지만 당시의 기분은 뭐랄까 둥실 하늘을 떠가는 흰 구름을 타고 멀리 멀리 날아가는 기분, 그런 것이었다. 당시에도 팬레터는 여중고생들이 가장 많았는데 주로 오빠, 친구를 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모든 팬레터들이 모두 그렇듯이 한번 읽고 나면 그만인 경우가 많은데 꼭 하나 잊지 못한 팬레터가 있었다. 전라도 여천군에 있는 거문도란 섬에서 희원이라는 소녀가 보내온 팬레터였다. 당시 여중 3학년이던 희원이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지체 부자유자였다. 희원이의 꿈은 외딴 섬에 홀로 사는 등대지기가 되는 것이었다. 불편한 다리로 도시에 나가 살기보다는 물새들을 벗삼아 살면서 어두운 바다를 비춰주는 고독한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오빠의 노래도 더 많이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까지 해왔다. 나는 희원이의 글을 자주 읽으면서 무슨 말을 해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사람들이 싫어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소녀, 그래야만 오빠 노래를 더 많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소녀 앞에 머리를 치렁치렁 땋고 다니는 고등학교 3학년짜리가 해줄 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기껏해야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사서 부쳐준 것이 고작이었다. 희원이의 편지는 1년쯤 계속되다 끊어졌다. 희원이가 과연 소원대로 등대지기가 됐는지 아니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도시로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등대지기보다는 조금 불편하지만 그런 대로 밝게 살아가는 도시 여성이 돼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더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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