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자서전 5. 첫사랑, 그리고 종이학
이 글은 서태지가 21살때 서태지와 아이들 데뷔후 스포츠 서울의 지면을 빌어 자신의 자라온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난 이 무렵 처음으로 이성친구를 사귀기도 했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된 K양은 나이와 학년이 같은데다가 음악을 좋아하는 취미까지 같아 하루종일 경복궁 등지를 쏘다니며 얘기를 나눠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맞았다. K와는 일요일이나 토요일 오후 종로나 대학로 등지에서 자주 만났는데 음악과 학교생활, 가정 이야기들이 주 화제였다. 창백한 얼굴에 조용한 성품의 K는 주로 내가 하는 말을 듣는 편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입을 열어 한마디 할 땐 남자 못지 않게 당돌한 점도 있었다. 한번은 경복궁에 함께 놀러간 일이 있었는데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농지거리를 하자 대뜸 '너희들 방금 뭐했니'하며 나를 대신해서 따끔하게 혼을 내준 일도 있다. K는 유난히 편지 쓰기를 좋아해 일주일이면 꼭 한 두 번씩 내게 편지를 보내와 나는 누나 몰래 편지를 읽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리들의 사귐도 정확히 4개월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K가 어느 날 수십 마리의 종이학과 함께 앞날을 위해 헤어지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편지에는 또 '뒷날 훌륭한 사회인이 되어 다시 만나자'는 추신도 함께 있었다. 나는 무슨 이유인지 당장 찾아가 만나 보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럴만한 용기를 갖지는 못했다. K는 그 후 매정스럽게 한번도 내 앞에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어쩌다 하교 길에 한번쯤 맞닥뜨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행운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난 요즘도 조금 시간이 한가해지면 K 생각이 자주 난다. 아마 K는 지금쯤 훌륭한 대학생으로 성장했을 것이고 TV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명 정현철을 버리고 서태지란 가명을 쓰고 있지만 얼굴을 보면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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