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 자서전 12. End

Posted by RAY.D
2015. 7. 28. 19:14 뮤지션 이야기/국내



블로그장 백 : 한동안 바빠서 미뤄둔 서태지 자서전?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옮겨적었습니다.

재미있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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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요즘 모처럼 시간이 한가해져 주노형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오가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조금씩 회복해 가는 주노형을 보면서 무거웠던 내 마음도 조금씩 밝아오는 것을 느낀다. 흔히 쓰는 말로 '불행중 다행'이란 말이 있는데 바로 우리 팀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주노형이 조금 늦게 병원에 도착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의사 선생님이 만약 30분만 늦었더라면 큰일 날뻔 했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지 않았던가. 죽고 사는 문제에 관한 절대자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고등학교 시절 겪은 한 친구의 죽음, 지금도 늘 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그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난 절대자의 존재를 믿게됐다. 그렇게도 생생했던 친구가 하루만에 교통사고를 당해 시체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절대자의 뜻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겠는가? 이런 생각 때문에 난 주노형이 병원에 빨리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우리 팀은 주노형이 퇴원하더라도 당분간 활동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풀썩 풀썩 뛰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공연인데 맹장이 아픈 사람은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동안 잡아놓았던 TV와 라디오를 비롯, 각종 공연 스케줄이 어쩔 수 없이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게 됐다. 모처럼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그런 대로 괜찮은 일 같기도 하지만 팬들에게는 미안한 생각뿐이다.


 나는 시나위에 들어가면서 적잖은 수입이 생겼다. 당시에 고3생들의 한달 용돈이 3~4만원이었는데 매달 그보다 수십곱이나 많은 액수가 들어왔다.나는 이 돈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악기를 사는데 사용했다. 다른 악기는 크게 비싸지 않아 내 돈으로 가능했지만 믹서 콘설만은 내 힘으로 아무리 모아도 모자랐다. 일본에 알아보니 가격이 2천만원이 넘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그 동안 내가 모아두었던 1천만원을 갖다 드리며 나머지는 아버지가 보태서 사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몇 달후 집안에 조그마한 녹음 시실을 갖출 수 있었다. 녹음 시실이 완료된 후 나는 기계를 놀리지 않고 다른 가수들의 녹음을 해줘 짭짤하게 수입을 올렸다. 이때부터 난 경제적으로 집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들어오는 돈이 적잖았기 대문이다. 콘서트나 TV 라이도 출연료가 주종을 이뤘고 때때로 CF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또 조금 인기가 있자 T셔츠를 만들어 팔기도 했는데 수입을 정확히 그룹 멤버 숫자로 나눠 가졌다. 난 형들이 돈을 나눠줄 땐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이제 갓 들어온 신참내기가 선배들과 똑같이 돈을 나눠 갖는 다는 사실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나 대철형이 멤버는 모든 것에 있어 공평해야한다고 주장해 더 이상 말을 끄집어 내지 못했다. 나는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불러 한턱 쓰기도 했다. 친구들이 만원 미만의 용돈을 가지고 다니는데 비해 난 꼭 10만원 이상씩을 지갑에 넣고 다녔다. 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니 자연 쓰임새가 헤퍼졌다. 친구들이 미처 갈 엄두도 못 냈던 압구정동의 카페를 거리낌없이 드나들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거의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때는 긴 머리가 너무 싫어 자를까 생각했지만 팀에서 결사 반대했다. 메탈 그룹은 이 긴 머리에 은근히 자부심을 갖기까지 했다. 난 머리를 기르면서 부모님의 두번째 반대에 부딪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첫 번째는 음악을 시작할 때였고 머리를 기르고 다니는 내 모습을 보고 두번 째 반대를 한 것이다. 난 다시 집요하게 설득을 했다. 아버지는 뒤에 말씀하시기를 기타를 품에 안고 자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하고 싶은 것이라면 모든 것을 양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였지만 역시 고등학교 3학년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려오게 기르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나는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실제 18살의 나이를 20살로 올려 말했다. 18살과 20살은 2살 차밖에 안되지만 실제 외부로부터 받는 대접 면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말하자면 어엿한 어른 대접을 해주었던 것이다. 라이브 공연이 늘어나면서 팬레터도 늘어났다. 당시엔 하루 7~8통씩의 팬레터가 도착했는데 한 통도 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지금도 한 상자 정도가 보관되어 있다. 부모님들은 뭐 그리 귀한 것이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난 팬들의 정성이 가득담긴것 같아 이사를 갈때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챙겨 가지고 다녔다. 난 원래 내 물건을 쉽게 버리는 성격이 아닌 탓도 있지만 어렵게 써 보내준 팬들의 성의를 생각하면 팬레터 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요즘도 난 팬들이 보내준 편지를 거의 버리지 않고 집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 팬들이 보내준 선물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물중엔 학이 가장 많은데 대충 4만 마리는 되는 것 같다. 1천마리를 접으려 해도 여러날이 걸린다는데 4만 마리를 접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인지 생각해도 까마득하다. 이 밖에 팬 가운데 대전에 사는 한 여고생은 학 2만 마리를 접어 보내온 일도 있었다. 대전에서 공연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어떤 여고생 두 명이 호텔 방문 앞으로 찾아와 무슨 보퉁이를 내밀고 달아났다. 무엇인가 얼른 풀어봤더니 형형핵생의 종이로 접은 종이학이었다. 이 팬은 특이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써놓지 않아 지금도 이름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다. 팬들이 보내준 선물들은 인형 그림 기사 모음집 티셔츠등 종류가 다양하다.


시나위시절 돈이 한푼이라도 생기면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쓰지 않고 저축해두었다가 내가 악기 구입등으로 큰 돈이 필요할 때 내어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일찍이 나의 다부진 성격을 알아차리시고 내가 하는 일에 특별히 간섭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도와주려 애썼다. 비록 대학은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3학년 1학기가 다 갈 무렵엔 갑자기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다 가는 대학을 왜 나만 못 가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고등학교때 친구인 이한표 박현성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내가 음악에 미쳐 떠돌아다닐 동안 두 친구는 대입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지금 이 두 친구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만날 때마다 옛날 생각이 나 지금도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그러나 막상 대학을 간다고 해도 문제가 많았다. 음악을 하려면 서울예전 실용음악과나 중대 음대를 가야 하는데 이곳에서도 내가 배우고 싶은 메탈 분야는 가르치지 않았다. 말하자면 대학을 가도 필요없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다른 대학에 가서 음악 아닌 다른 것을 전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난 당시에도 내가 음악을 그만두면 완구점이나 과학사 같은 것을 차려 운영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잔잔한 손재주가 필요한 완구 제조업이나 가게 또 어른들도 가지고 놀 수 있는 모형비행이나 자동차등을 취급하는 과학사를 열면 절대로 싫증이 나지 않을 것 같고 장사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또 이런 것들을 자주 만지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 무언가 새롭고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있었다. 자랑같은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난 학교에서 실시한 IQ테스트에서 134를 판정받았다. 집에서 아이템풀로 실시한 테스트에서는 153이 나온 일도 있다. 그러나 이 머리는 음악과 기계제작이나 조각분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음악과 공작분야 이외에 취미도 없고 너무너무 둔한 편이었다. 특히 돈을 버는 일 도 계산하는 일등에는 나처럼 센스없고 둔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IQ이야기가 나온 김에 누나 이야기도 한번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다. 현재 모 대학 화학과 4학년에 재학중인 누나는 IQ는 나와 같은 134정도이지만 모든 면에서 나보다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누나는 몇 달 공부하더니 굉장히 어렵다고 소문난 1급 수질오염검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누나는 이 자격증만 갖고 있으면 취직뿐만 아니라 장차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며 벌써부터 자랑이 대단하다. 하여튼 난 이런저런 갈등을 겪으면서 이듬해 1월 고등하교를 졸업했다. 난 그 동안 학교에 잘 나가지 못해 졸업식장만은 꼭 가고 싶었지만 결국 긴 머리때문에 졸업식장도 가지 못하고 누나가 대신 졸업장을 받아왔다.


 나는 졸업식이 있던 날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술집에 몰려갔다. 졸업식에 못 온 나를 위로하기 위해 친구들이 몰려온 것이다. 나는 이날 처음으로 술도 먹어보고 담배도 피워봤다. 이 날은 못 먹는 술이지만 괜히 한번 취해보고 싶었다. 음악을 한답시고 충실히 다니지 못한 3학년간의 학창시절이 새삼 후회스러웠다. 친구들은 빨리 출세했다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이 때 심정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난 그날 이후 술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졸업식날 한번 취해보니 술은 먹는 것보다 안 먹는 것이 일생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가족 이야기를 좀 더 할까한다. 우리 아버지는 모두가 3형제인데 모두가 발명가들이다. 큰아버지는 계동 현대빌딩 옆에서 금방과 안경점을 하고 계신데 머리가 특출하신 분이다. 무엇이든 한번 보면 그대로 만드는 남다른 손재주를 갖고 계신다. 요즘같은 불황에도 가게에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같은 손재주 때문이다. 물론 평소 남을 속여 먹을 줄 모르는 진실한 마음씨도 오늘 같은 신용을 얻는데 보탬이 됐을 것이다. 작은 아버지도 발명가를 활동하고 계신다. 작은 아버지는 현재 가지고 계신 전자계통의 특허가 6개나 돼 가만히 계셔도 수입이 엄청나다. 난 가족 중 작은 아버지 아들인 현수(현재 고등학교 2학년)와 가장 가깝게 지낸다. 말이 사촌이지 친형제나 다름없다. 내가 현수와 자주 붙어 지낸 것은 두 사람의 생각이 바로 똑같기 때문이다. 현수는 생김새부터 행동까지가 꼭 나의 몇년전 옛날과 같다. 과학 공상만화를 즐겨보는 습관이나 기계에 대한 호기심, 무얼 만드는 손재주, 미래의 꿈이 나와 거의 비슷하다. 내가 가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방과후엔 거의 붙어 지냈다. 집도 거기가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데다 취미가 같으니 자연 붙어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가 가장 즐겨 찾은 곳은 만화가게였다. 한번 가게에 들르면 어두울 때까지 과학공상만화를 수십권씩 읽어야 직성이 풀렸다. 현수는 내가 가수로 유명해진 후 불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몇 번이나 만화책을 빌려다 줘도 내가 시간이 없어 못 보자 요즘엔 아예 빌려오지 않는다. 현수는 내가 자랑스러워 '서태지가 우리형'이라고 주변에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친구들이 거짓말이라고 믿어주지 않아 요즘엔 아예 모른척한다고 한다. 현수와 나는 내가 노래를 그만두면 과학사를 차리기로 굳게 약속해두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쫄업한 후 시나위 멤버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여서 정신적으로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시나위는 인기는 있었지만 언더그라운드쪽 활동을 했기 때문에 TV출연을 별로 할 기회가 없었다. 유일하게 MTV 연예가 중예와 대종상 시상식때 출연해 얼굴을 내보인 적이 있었는데 무대에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가 없어 오히려 불편했다. 대신 잠실 체조경기장과 88체육관, 시내의 소극장등능 거의 우리의 독무대였다. 믿어 줄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우리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콘서트가 열리는 곳엔 언제나 팬들이 빽빽이 들어찼으며 어떤 때는 표가 동이나 암표까지 등장할 때도 있었다. 선물을 들고 오는 팬들도 적지않았다.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한 것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을 정도의 유명 미장원에서 머리를 손질해주겠다며 한번만 들려달라고 요청해온 것이다. 미장원뿐아니라 식당 술집 심지어 청소년 상대의 옷집에서까지 공짜로 제공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나 우리 팀은 노래외엔 얼굴 파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따. 돈보다는 음악 하나만을 위해 살자는 공통된 각오가 팀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시나위 입단한지 한 2년쯤 됐을 때부터 그 동안 잡음없이 공연에만 열중하던 팀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음악적 견해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엔 몰랐던 성격의 결함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래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룹이 오래가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하고 한소리를 내야 된다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팀은 오랜 생각끝에 팀을 깨기로 합의했다. 독자적인 음악 활동을 해보고 싶은 생각을 모두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도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이제야말로 나 개인의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한달동안을 집에서 뒹굴다가 난 녹음 준비를 했다. 당시 같은 멤버였던 김종서형도 같이 신곡 준비에 들어갔다. 난 무언가 새로운 것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몇날 밤을 설쳤다. 자 이제 어떤 모습으로 팬들 앞에 나타나야 되는가. 김종서형은 소리를 빽빽 지르는 샤우팅 창법을 선보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난 외국 가수들의 음반과 비디오 테이프를 구입해보며 앞으로 해야할 음악을 구상했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한 끝에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 랩댄싱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신해철 선배등 몇 사람이 랩 음악을 선보이긴 했지만 본격적인 랩 음악은 아직 국내에 상륙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랩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주변의 반대가 대단했다. 너무 낯설다는 것이 반대이유였다. 그러나 한번 결정한 마음을 쉽게 변경할 내가 아니었다. 난 자작곡을 편곡해 집에서 녹음을 시작했다. 이 때쯤 난 한 선배의 소개로 조그마한 녹음실을 운영하여 반도음반의 기획파트를 봐주던 유대영형을 알게됐다. 내 음악을 들어본 대영형은 괜찮을 것 같다며 반도음반의 최사장에게 소개해줬다. 이렇게 해서 난 반도음반과 3년간 전속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다음 한 일이 랩댄싱을 할 팀 멤버를 찾는 일이었다. 운이 좋았던지 마친 박남정팀에서 춤을 추다 그만두고 안무지도를 하고 있는 이주녀형을 알게 돼 당장 멤버로 끌어들였고 주노형의 소개로 춤솜씨가 뛰어난 양현석도 입단을 허락 받았다. 난 유대영형의 녹음실에서 노래를 취입하면서 뒷날 팬들에게 사랑을 흠뻑 받게 된 랩댄싱을 이때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랩댄싱을 이렇게 하기까지는 춤에 관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가인 주노형의 공이 컸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여곡절 끝에 대망의 독집음반이 나온 것이 지난 5월 5일. 난 아직도 디스크가 맨 처음 내 손에 쥐어지던 그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함께 얻은 기분이라고 할가. 아버지도 디스크를 처음 받아보시더니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디스크를 내놓고 정확히 30일 사방에서 가수 서태지를 찾는 소리가 들려오고 인터뷰 요청이 줄을 잇고... 너무 바빠 어떻게 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기억조차 없다. 이제 내게 남은 소원이 있다면 돈을 좀 많이 벌어 가난한 그룹 가수들이 언제라도 가볍게 이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하나 갖는 것이다. 또 그 동안 넓은 마음으로 철없는 아들을 한없이 이해하려 애쓴 부모님에게 좋은 선물 하나씩을 사드리고 싶다. 그 동안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신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