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인터뷰 (성우진)

Posted by RAY.D
2014. 10. 28. 00:02 뮤지션 이야기/국내

100대 명반 선정 앨범 : 넥스트의 [The Return of N.EX.T PART I The Being]

      대담 : 넥스트 (신해철) VS 성우진
      글 : 성우진 (음악평론가) / 사진 : smooth

"넥스트 2집은 신해철 음악의 진정한 시작점이다."

 


성우진 : 요즘 어떤 작업을 하며, 어떻게 여가시간을 보내나?

신해철 : '베이스볼 2003년도 버전', 토탈 워에서 나왔던 옛날 전쟁 게임 '쇼군' 같은 클래식 게임들을 옥션에서 구해서 하고, 집에서 애 보며 놀고 있다. 근래에 하는 일은 똑같다. 회사 운영하고. 최근에는 밴드 'Beautiful Day' 앨범이 나왔다. 계속 인디펜던트 밴드들 지원하는 사업들을 하고 있다. 넥스트는 여전히 밑도 끝도 없는 연습과 녹음을 하고 있고.

성우진 : 넥스트는 새롭게 라인업이 확정되어 연습에 들어가 있는 것인가?

신해철 : 아직 라인업 일부가 확정 안 됐다. 현 단계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성우진 : 오케스트라 버전의 진행 상황이나 계획에 대해 알려 달라.

신해철 : 사실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넥스트가 협연을 하며 무대에 올라가면서, 해보고 싶었던 것은 다 해봤다. 그 앨범 출반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계획이 잡혀있는 것이 없다. 오케스트라를 씌운다 어쩐다 하는 것들은 이미 어느 정도 성취를 느껴 봤고 실험도 많이 해본 상태라 그것보다는 뭐 좀 재미있는 게 없을까,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고 있다. 예를 들면 이번 앨범을 레코딩 할 때는 '더빙 금지령'과 '컴퓨터 사용 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녹음은 아직 정식 개시는 안했는데, 할 경우에 드럼, 베이스, 기타가 모두 한방에 간다고 공언해놨다. 그러자 멤버들이 보컬도 한방에 가라며 반항을 한다. 그럼 보컬도 한방에 가겠다. 그러면서 싸우고 있는 중이다. (웃음)

성우진 : 넥스트 1집 앨범인 [Home]은 예전 무한궤도 사운드의 연장선상이라는 평가도 많았다. 그러다 [Being]이 나오면서부터 확실한 색깔이 드러났다. 당시 애로사항이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나?

신해철 : 그 당시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상황이었다. 불과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그렇게 변화가 일어났나 싶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녹음 기술이 지금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다. 특히 록 분야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지금은 어떤 엔지니어라도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조차 당시에는 그야말로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였다. 일단 녹음을 할 때 원하는 사운드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방법도 모르겠고, 완전히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걸리면 다행이고, 아님 망가지는 것이었다. 요즘은 완전히 망가져서 무너지는 창피한 지경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보장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시도해봤다가 안되면 무참하게 깨지는 그런 경우라 굉장히 긴장 하고 음악을 해야 했다. 기타 앰프에 마이크를 대는 방법에서부터 시작해, 뭐든 기본적인 것들이 갖춰져 있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일단 많이 듣고 연구하고, 그런 시간이 굉장히 길게 축적되어 있었던 것을 드디어 맘 잡고 시도했던 것이니, 탐구 작업은 굉장히 많은 셈이었다.

성우진 : 지금 들으면 아쉬움이 많겠다.

신해철 : 막상 녹음에 들어가서는 이게 지금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지, 어느 동네로 가고 있는 것인지 몰랐었다. 외국 밴드 앨범을 들어보면 기타 소리가 그렇게 나오고 드럼 소리가 그렇게 나오는데, 왜 우리는 그게 안 되는지. 사람 문제인건지, 기계 문제인건지 몰랐다. 정말 그런 상황에서 음악을 했다. 그래서 굉장히 가슴 아픈 부분이 많다. 이 앨범이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의 입에서 계속 오르내리고, 명반이라 이야기를 해버리면 사실 굉장히 갑갑하다. (웃음) 그 다음 앨범부터 사운드가 급격히 좋아졌다. "그 다음 앨범을 뽑아주면 안 되겠니?"라고 생각을 하는 데도 사람들이 [Being] 앨범을 좋아한다. 무척 서툰 곡도 많이 들어가 있고, 시도 했다가 완전히 망가졌던 곡들도 1~2곡 들어가 있어 굉장히 슬픈 앨범이라 개인적으로는 이 앨범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성우진 :[Being] 수록곡은 8곡이지만 18곡 이상의 느낌을 받을 수 있는 대곡 지향과 다양한 시도, 그리고 갑작스러운 진보가 이루어졌다. 밴드 멤버도 변화가 있었다. 마치 숨어있는 인물과 다름없었던 기타리스트 임창수를 어떻게 합류시키게 됐는지 궁금했고, 이수용 역시 부산출신 밴드에서 활동하던 막강 드러머였는데, 어떻게 소개받고 합류시켰는지 놀랐다.

신해철 : (웃음) 넝마주이처럼 주우러 다녔다. 사람 풀고 여기저기 연락 하고, "드럼 좀 잘 치는 사람 없을까? 기타 좀 잘 치는 사람을 알려 달라." 해서 연락도 기다려 봤다. 음악 하는 후배들을 불러 앉혀놓고 "일주일의 시간을 주겠다! 좀 잡아와라"라고도 했다. 마스크를 쓰고 몰래 라이브 공연할 때 가서, 뒤에 서서 몰래 보기도 하며 찾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뛰어난 연주자도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란 그만큼 중요했다. 죽어라 하고 찾아 다닌 결과가 그 것이다.

성우진 : 녹음한 멤버들은 더 많았다고 들었다.

신해철 : 당시 상황은 굉장히 복잡했다. 당시에 드럼 이수용이 가입은 했지만, 앨범이 거의 마무리된 다음에 들어왔었다. 그래서 그 앨범 녹음에는 다른 드러머가 3명이 동원이 됐고, 기타 배킹 트랙, 베이스 연주의 대부분, 그리고 키보드까지 내가 쳤다. 기타리스트도 중간에 여러번 바뀌었다.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Being] 앨범은 사람들이 넥스트란 밴드의 정체성을 처음 제대로 확립해준 앨범이라고들 평가를 해주긴 하지만, 그야말로 개판새판 날라다니며 했던, 오히려 솔로 앨범에 가까운 앨범이다. 연주를 해야 하는데 베이시스트가 마땅치 않으면 그냥 내가 연주했다. 베이스는 줄이 훨씬 거칠지 않은가? 연주하지 않던 베이스를 치니까 손가락도 붓고 해서 편법을 많이 썼다. 베이스 줄 4개 중에서 1, 2, 3번 줄을 끊어버리고 제일 굵은 줄만 남겨서, 그것으로만 끝까지 녹음을 하고 그랬다. 녹음은 그렇게 해도 됐으니까. '이중인격자'도 기타 배킹 같은 경우는 내가 연주한 것이다. 마음 고생 몸 고생 하며, 멤버들은 구해가면서도 중간에 교체하고 녹음 하고. 사실은 정말 산만했다.

성우진 : 원래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것으로 안다. 어쨌든 본인이 기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좋은 기타리스트들을 발굴하는데 있어 시각과 능력을 갖추게 되지 않았나 싶다.

신해철 : 기타는 좀 창피하다. "보컬이나, 편곡, 프로듀서 공부 등 이런저런 역할 등을 하기 위해 기타 연습 시간이 모자랐다." 하고 핑계를 대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다. 남들 연습하는 시간만큼 했고, 아니 그들 연습하는 것보다 더 했다. 그런데 안 되는 거다. 슬펐다. (웃음) 남들보다 더 열심히 했는데 그래도 안 되는 걸 어떡하나? 물론 그 이면에는, 지금도 이렇게 손에 땀이 줄줄 흐르지만, 악기를 다루기에 치명적인 병인 다한증을 가지고 있었다. 또 손가락이 짧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문제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재능이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기타리스트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은 절박했다.

성우진 : 김세황을 높게 평가해서 영입한 이유는?

신해철 : 당시 이미 첩보 부대가 김세황의 동태를 파악해 놓고 있었다. 나는 무대에서 꼿꼿이 기타 치는 스타일을 싫어한다. 지금도 내 회사 소속 밴드들은 앉아서 연습을 하면 야단을 많이 맞는다. 나중에 무대 위에 올라가 앉아서 공연을 할 거면 앉아서 해도 되지만, 무대 위에서 멜빵 메고 서서 칠 것이면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다. "네가 로버트 프립(King Crimson의 기타리스트 - 굉장히 정적인 분위기의 연주자로 기타학자로도 불린다)이냐? 그 사람은 공연때도 앉아서 기타를 치니까 그래도 되지만, 안 그럴거면 그러지마!"라는 거다. 김세황은 테크닉도 테크닉이었지만, 첩보부대가 전해오는 소식통에 따르면 무대 액션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놈이 필요하다!"라고 했었다. 그래서 1순위였는데 당시 김세황의 계약이나 여러 가지 상황이 당장 합류 할 수 없었기에, 대신 임창수를 소개 받아 찾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둘 중 누가 우위라고 도저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검객으로 따지면 임창수 쪽은 내공이 심오한 검법을 쓴다고나 할까? 김세황이 초식이 화려한 검법을 쓴다면, 그런 셈이다. 하여간 좋은 기타리스트들을 많이 만났다.



성우진 : [Being]앨범에서 보여준 신해철의 색깔은 과거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신해철 : 무한궤도 때는 아무튼 소프트 록 같은 것을 했고, 그 다음에는 발라드 가수로 변신해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같은 것을 불렀고, 다음에는 허리 춤을 추면서 '재즈 카페'를 불렀고. 그런 식의 이런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얘가 뜬금없이?!" 라고 생각을 했겠지만, 사실은 그게 내가 청소년 때부터 갖고 있던 그림으로 돌아간 것이다. 만일 음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과 이런저런 여건과 시간이 갖춰졌다면, 넥스트 2집 같은 게 내 음악 인생의 출발이 됐어야 맞다. 그런데 내 사고 방식이 지금 당장 안 되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천천히 돌아가자라는 식이었다. 일단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말이다.

성우진 : 음악의 초심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인가?

신해철 : 1986년도에 대한민국 헤비메탈이 태동했다는데, 나는 그 현장에 있었던 꼬마(?!)였다. 그 당시에 부활, 백두산, 시나위, H2O의 헤비메탈 4인방이 뜰 때, 그 4인방 중에서 부활 김태원의 졸개로써 기타를 들고 따라 다니며 열심히 튜닝을 하며 사부에게 기타를 배웠다. 주위에는 전부 머리카락이 긴 형들 "우아~ 우리는 록, 우리는 패밀리!~" 이런 사람들 밖에 없었다. (웃음) 그러니 당연히 문화도 완전히 그런 쪽에서 배웠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아트 록에 좀 빠지게 되고, 그 전까지는 오로지 헤비메탈 "주다스 프리스트 짱!" 뭐 이거였다. 특히 메탈리카가 나오고 나서는 정신적으로 피폐되어 학교에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내 또래 중에서 빨리 배우고 빨리 하던 사람은 손무현 같은 친구가 있었다. 동갑인데 그 당시 부활에 들어가서 김태원과 트윈 기타를 치고 있을 정도였다. 엄청 열 받았다. 또 신대철의 동생 신윤철은 이미 강북과 강남 일대에서 명성을 파다하게 날리고 있었고, 오태호도 마찬가지다. 동갑들에 비해 왕창 떨어져 있는데 비열하게 '대학가요제'에 나간 거다.

성우진 : 당시에 로커가 대학가요제 나가는 건...

신해철 : 언더그라운드 씬에서는 대학가요제는 완전히 비웃으며 하찮게 여기던 그런 대상이었다. 파고다 극장 (주로 헤비메탈 밴드들이 이 극장에서 공연을 많이 했었다) 밴드들이 보기에 대학가요제에 나와서 띵띵거리는 팀들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밴드로도 안 쳤다. 그래서 대학가요제에 나간다고 하면 형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고 "너는 록이 아냐, 앞으로 우린 보지 말자." 이럴 것 같아서. 그리고 어차피 떨어질 것 같으니까 대학가요제에 숨기고 나갔었다. 그런데 대상 타는 것을 김태원 형이 당구장에서 본 것이다. (웃음) 욕은 안 하더라. 축하해줬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무한궤도'가 옆구리다. 밴드를 하던 팀이 해산되면서 동창들 밖에 같이 할 사람들이 안 남았고, 그 바람에 '무한궤도'가 만들어져 평소에는 하지 않던 옆구리 음악을 좀 했다. 그 밴드가 해산되니까 할 수 없이 솔로를 하고, 그러다가 결국 돌고 돌고 돌아서 도착했던 게 넥스트 2집 앨범. 그게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었던 음악 쪽으로 발길을 처음 들여 놓은 앨범이 되는 거다.

성우진 : 굉장히 많은 음악과 앨범을 들은 마니아라 알고 있다. 해서 넥스트의 [Being] 앨범을 듣다보면 한 앨범 안에서 굉장히 많은 장르와 여러 소리를 찾을 수 있다. '이중인격자'를 듣다보면 이것은 스피드 메탈, 프로그레시브 메탈 같은 느낌도 있다. 반면, 대중들 사이에서는 '날아라 병아리'라는 곡이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앨범이 당시 50만 장 이상 나갔다. 넥스트 입장에서도 상업성과 예술성을 다 겸비한 것으로 평가 된다. 컨셉트를 정할 때, 너무 모험이 아닌지, 너무 앞서 나가서 대중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없었나?

신해철 : 솔로로 두 번째였던 [재즈 카페] 앨범을 내고, 넥스트를 결성하게 될 때 집안 빚을 다 청산했었다. 그래서 이젠 굶어 죽어도 혼자 굶어 죽으면 되는 상황이라, 신경 안 쓰고 밴드를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밴드를 한 것이었다. 상업적인 배치나 그런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신경을 안 쓴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을 쓴 것 같지도 않다. 히트는 '날아라 병아리'가 했지만, 하이텔 같은 통신의 동호회에서는 '껍질의 파괴'나 '오션' 등의 곡들이 화제였다. '날아라 병아리'가 판을 팔아주고, 다른 노래들이 음악성을 잡아주고 그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앨범에 10분짜리 노래를 집어 넣는다든가 하는 것들이 사람들의 구매 욕구를 당기기도 했다. 비틀즈 같은 경우에도 그렇게 음악을 했지만. 또 상업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잡았지만 그 사람들이 곡을 만들 때 "이건 상업성이야. 쿠하하." 이러고 만들었겠나? 음악을 할 때 그렇게 머리를 너무 많이 쓰면 안된다. '이게 과연 팔릴까, 안 팔릴까' 그런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 언제 작업을 하고 있겠나? 그런데 그 당시 기분은 기세등등하고 굉장히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넥스트 1집과 2집 사이에 공백이 있었고, 그리고 그 사이에 군대를 갔었고, 이후에 형무소에 가게 되었다. 그래서 2집 앨범으로는 모든 방송에 출연 금지가 되어 있었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실패한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대중들에 대한 일정한 믿음이 있었다.

성우진 : 넥스트는 콘서트계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이번 공연을 보고 나면, 다음엔 또 어떻게 할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가 앞서게 만드는 스타일이었다. 이번엔 어떤 의상을 입고 나올까 하는 상상도 있었다. 또 어떤 무대 디자인으로 꾸며져 있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공연 자체의 컨셉트를 그렇게 잡게 된 것도 예전부터의 열망이나 희망이 표현된 결과인가?

신해철 : 대학로에 80년대에서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밴드 음악 했던 사람들에게는 빠질 수 없는 'MTV'라는 업소가 있었다. 당시는 우리나라에 미국에서 유명해진 MTV 채널이 안 들어왔었기 때문에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는 장소가 거기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생들도 거기에 가서 몰래 콜라 시켜놓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뮤직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서태지도 거기 죽돌이 출신이다. LA메탈 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수도 없이 보며 '왜 우리는 저렇게 못 하나. 우리나라 관객들은 왜 일어나서 안 뛰나. 앉아서 무슨 록을 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앉아서 보는 록 공연이 세상에 어딨어?'라고 기본적으로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록의 역동적이고 마구 뛰노는 듯한 모습을 접목했다. "다 덤벼라 덤벼, 나가서 자빠지자, 오늘밤 다 죽는다" 하는 정신에다가 나찌의 선전, 선동 유술에 나오는 기법 등이 동원되어서 넥스트 특유의 그 이상한 공연 분위기가 만들어진 거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걸 두고 '사이비 종교'라 운운했다.

성우진 :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의 박진영, 양현석 같은 궤도로 가는 것도 가능했을 것 같다. 지금의 싸이렌 레이블, 그리고 굳이 홍대쪽으로 들어가서 다각적인 방향으로 언더그라운드, 인디 밴드들을 후원하고 있다. 게다가 "저 정도의 밴드들까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레이블 내의 밴드들도 다양하다. 무슨 확고한 뜻이 있어서 일부러 고생이나 노력을 하고 있다고까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확실하게 계획이나 비전 같은 것이 마음속에 있는 것 같다

신해철 : 돈 안되는 모든 일들을 한다고들 말한다. 주변의 걱정이나 우려, 무척이나 많다. 태클 역시 많다. 돈 좀 챙겨서 편하게 사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기부 같은 것을 할 수도 없는 게, 주위의 후배들이 다 불우이웃(?!)이라 그들을 도와야지. 뭐 집 없고 차 없고 땅 없는 사람들을 도울 처지가 못 된다. 집은 나도 없는데 뭐. 내 나이가 되면 방황을 할 시기는 아니다. 20대 때 하는 방황은 멋있을 수도 있는데 30대 때 방황을 하면 좀 꼬질하고, 40대 때 방황을 하면 추하다. 물론 50대가 되고 60대가 되어도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도전하고, 그러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나이 40이 되면 헤매 다니기 보다는, 평생 고민한 것에 대해 방향 설정이 이미 끝나서 그 길을 계속 가야 된다는 거다. 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느낀 게, 그 나라 사람들은 상류 계층으로 상향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거의 없다. 노동자로 태어났으면, 노동자로 행복하게 살다가 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것을 연구한다. 어떡하면 '나도 월급 주는 사장 입장이 되어서 한번 남을 부려볼까'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그런저런 경험과 공부들을 하고 나서 '그럼 신해철이란 뭐냐?!' 세상 시각에 따라서는 내가 부잣집 아들로 곱게 자랐다고 볼 수도 있다. 이제는 변명 안 할 것이다. 그냥 부잣집 아들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련다. 학생 때부터 오로지 오매불망 하고 싶었던 꿈은 밴드였고, 그 꿈을 이미 이뤘다. 그렇다면 나는 꿈을 이루었으니,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우진 : 싸이렌 레이블에 소속된 밴드들은 조금 더 골라낼 수 있었을 텐데 뭔가 애정이 담겨있는 듯하다. 음악을 틀어주며 알았고 평가하던 것과는 달리 직접 소속 시키며 식구가 됐을 때의 밴드들은 어떤 점이 다른가?

신해철 : 일단 같은 식구가 되면 내가 악역을 맡아야 한다. "녹음비 적게 써라. 뭘 몇 장이나 판다고 얼마를 쓰니 지금." 이런 역도 해야 되고, "히트 곡 내 XX... 그 다음에 이야기해!" 이런 역도 해야 되고. (웃음) 그냥 음악 하는 사람들끼리 떠들면서 뭉쳐서 살면서 뭐 그런 것들이 즐겁다.

성우진 : 지금의 대중음악계를 보는 견해는 어떤가?

신해철 : 우리 주변에 음악만 나오면 환장하고 하는 애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선진국에 가 보면 그런 애가 하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그런다. 하지만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그런 사례들이 드물다. 음악적인 것을 좋아할 여지가 다분한 정열적인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부터 그런 것들을 부모가 대단히 경계시하며 자라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가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는 하지만, 본인들이 음주가무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지 남들이 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이 아니다. 프로페셔널들이 직업인으로써 장인정신을 가지고 만들어 낸 음악도 가장 좋은 음질을 통해 듣는 것도 아니고, 가장 저질 미디 싸구려 기기에서 나오는 반주에 맞춰 귀 버려가면서 자기가 노래를 불러야만 하고, 그런 시간이 훨씬 많으니까. 아무래도 음악의 미래라는 게 이렇게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노래방 가서 에코 왕창 걸어놓고 노래 조금 불러보고, 노래 좀 된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는 가수들을 우습게 알기 시작하게 된다.

성우진 : 이제는 가수들끼리만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 개그맨, 레슬링, 격투기 하는 사람 등과도 함께 평가되는 세상이 됐다.

신해철 : 한 템포 더 지나가봐야 된다. 노래방에서 피나는 연습을 통해 전 국민이 다 노래를 잘 하게 되면 '야~ 너도 나도 노래는 다 웬만큼씩 잘 하는데 어떻게 해서 저 사람만 스타가 되는 걸까?'라 생각하며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면서 귀하게 여기는 그런 풍토가 다시 올 것이다. 지금 서양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웃음)

성우진 : 아티스트 신해철의 음악적인 전투정신을 고양시켰던, 아니면 요즘 개인적으로 가장 화를 치밀게 했던 일이나 사건은 무엇이 있나.

신해철 : 사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우리 회사 직원들이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게 내가 아무리 뒤집어 엎고 화를 내봐야 5분 뒤엔 헤헤~ 웃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까 세상을 향해 내가 뭐라고 막 말하는 것 같아도 평상시엔 늘 화가 치밀어 살고 있지 않다. 그냥 게임하고 만화 보고, 집에 가서는 마누라 등에 업혀 있다가 애기랑 논다. 평상시에는 그렇게 지낸다. 그리고 평상시의 삶은 그래야만 한다.

일시 : 2008년 2월 23일(토), 오후 5시
장소 : 신공덕동 사이렌 사무실
진행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www.gaseu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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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일상을 조화시켜온 멋진 이중인격자 (?!) '신해철'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같은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거나 민망해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 신해철, 그리고 뮤지션 신해철은 평가주체에 따라 이분법적인 호불호(好不好)가 갈리고, 음악적인 면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이름이 아닐까 싶다. '마왕'이나 '교주'로까지 불리며 절대적인 신봉 속에서 카리스마적인 모습과 음악으로, 골수 팬들을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상대적으로 그를 폄하하는 부류들은 노래 실력보다는 말발이 좋은 '과대평가' 가수의 대표 주자로 뽑으며 험담을 날리기도 한다. 또 그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고, 평생 몇 번 울어봤을 것 같지 않은 캐릭터로 보이기도 한다. 반면 사흘 굶은 시어머니 마냥, 궁시렁대며 어려움을 잊기 위해 게임에 몰두하고 있거나 자신의 아내에게 무한 닭살이 돋는 그만의 애교 타임을 만들고 있을, 너무나 인간적이고 천진난만한 인물이 그이기도 하다.

메탈키드 시절을 거쳐 대학가요제 대상을 거머쥔 귀공자풍 대학생 음악인이 됐고, 그렇지만 원래 몰두했던 기타리스트의 꿈을 (재능의 한계를 인정하며) 뒤에 두게 되면서부터는, 무대를 휘어잡고 화려한 언변과 선동술로 팬들을 울리고 웃기는 밴드의 프론트맨으로 거듭나게 된다. 대마왕, 교주면 어떻고 논객이면 어떤가? 그런 카리스마와 영민함 속에서 그는 무한한 후배 사랑과 현실적인 음악계 참여를 몸소 실천하는 행동파 양심맨이기도 하다. 그를 신뢰하고, 손을 뻗고 발을 구르며 열광하면서 "그대에게~"를 외치는,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팬들이 있는 한 그는 변함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딴따라'의 삶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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